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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안나(사보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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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르데냐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3녀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1세의 황후.
2. 생애[편집]
1803년 9월 19일 로마의 콜론나 궁전[1] 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와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3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마리아 베아트리체 공주와 쌍둥이 언니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있었고, 마리아 테레사 공주와 함께 비오 7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1831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의 장남인 페르디난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할 때 마리아 안나는 27세로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1835년 3월 2일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마리아 안나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1836년 9월 12일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왕비로 즉위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지만 독일어를 배우지 않았고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2] 또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황후였지만, 동서 바이에른의 조피와는 다르게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건강 문제로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워했던 남편 페르디난트 1세를 간호하는데 집중하였고 스스로 간호사로 칭하기도 했다.
1848년 12월 2일,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남편 페르디난트 1세가 황위에서 물러났다. 비록 황제와 황후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페르디난트와 마리아 안나는 황족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퇴위한 후 프라하 성에서 거주했으며, 마리아 안나는 프라하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875년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이후, 1884년 5월 4일에 마리아 안나 또한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카푸친 교회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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